유례없는 더위에 헉헉 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 짙어지고 갑자기 초겨울 날씨처럼 기온이 급강하했다. 일시적 현상이고 예년의 기온으로 돌아가겠지만 계절은 어쩔 수 없이 돌고 돈다. 만산을 아름답게 물들인 단풍으로 해서 우리들 시름도 잠시 잊히는 것 같을 정도로 행복하다. 가을은 오곡백과 무르익어 마음이 푸근해서 좋고 삼천리금수강산이 그야말로 오색으로 수놓으니 눈 호사해서 더욱 좋다. 방송은 연일 단풍명소를 소개하기에 바쁘고 길은 막히고 또 막힌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좋다.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코로나에 찌들려 그런 재미를 빼앗겼던 게 어언 4년이니 어찌 아니 좋겠는가?
햇곡식을 추수해서 이집 저집에서 고사를 지내고 떡을 나누어 돌려 먹고 감, 밤, 대추 등을 따 담으면 이웃에 나누느라 신명 났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어른들은 김장 준비를 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하지만 아이들은 먹을 것 많고 날씨 좋으니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옥계의 단풍이 절정을 지나 낙엽이 지면 서서히 대게 철이 다가온다. 생각만 해도 미리 군침이 도는 계절이다. 칠보산의 단풍이 얼마나 황홀할까, 마음은 고향으로 달음질친다. 속이 꽉 찬 배추 한통 가운데를 좌악 갈라 씻은 후에 꽁치젓갈을 슬쩍 뿌려 겉절이를 해 놓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없어져도 모를 정도로 먹기에 정신이 팔린다며 깔깔대던 친구들이 오늘 따라 갑자기 보고 싶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고향에 다녀와야 할까보다. 철이 좀 지났다 하지만 물회도 좀 먹고 그 맛 나는 겉절이도 먹고 친구들 얼굴도 보고 그 좋은 풍광에 나도 눈 호사 좀 하고 와야겠다.
김여사가 활짝 웃으며 들어선다. 이 좋은 날씨에 안에만 있지 말고 바람 쫌 쐬러 나가자며 등을 떠민다. 반세기가 돼가는 고객이니 묵은 친구나 진배없는 김여사다. 그러자고 맞장구를 치며 겉옷을 챙겨들고 함께 나섰다. 모처럼 멀리 북한산 쪽으로 가보기로 하고 차에 올랐다. 일이야 좀 나중에 하면 될거 아니냐고 마음먹으니 편안해졌다. 북한산성 쪽으로 가다가 송추방향으로 계속 달리는데 단풍이 시원치 않다. 올해 단풍이 곱지가 않은 것 같다. 칙칙한 단풍에 시무룩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내 고향 영덕의 오색단풍을 그려본다.
참 좋은 세상에 살게 되니 단풍타령이로구나 싶어지며 옛 여인들의 애환이 갑자기 내 일인 양 떠오르며 미안해지고 한편 감사했다. 이맘때면 온갖 것 다 추수하고 갈무리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파묻혀 살았던 우리 어머니들을 생각하니 코허리가 시큰해진다. 겨울양식이라는 김장도 요즘과 달리 100포기는 기본일 정도이고 300포기 씩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고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가마솥에 죽을 가득 끓이고 양념을 산더미처럼 썰어야 했던 옛 여인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만 감사했을지도 모른다.
가난하던 시절 온 식구가 맛있게 먹을 것을 생각만 해도 좋았을 그 여인들 덕에 우리는 오늘의 풍요를 누리고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어른들의 고생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는 달콤한 열매를 앉아서 먹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씩 고마운 인사를 한다. 그 어른들에게 단풍은 아름다워서 즐길 대상이기 전에 이제 김장을 해야 할 때가 되는구나하는 암시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당에 김칫독을 묻고 무 구덩이를 파서 움을 만들고 고추를 말려 가루를 만들고 등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지 무슨 한가하게 단풍놀이를 생각이나 했으랴 싶다. 생각이 거기 이르자 칙칙하던 단풍이 갑자기 고운 자태로 눈앞에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없다더니 감사함에 생각이 미치니 똑 같은 경치가 갑자기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이다. 좀 더 가면 고운 단풍을 만날까 싶어서 줄곧 달리던 마음을 바꾸고 여기쯤에서 즐기기로 했다.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보니 마침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이다.
횡재라도 한 듯이 좋아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된 방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식탁이 놓여있다. 김여사와 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호수를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신기해하며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이미 어둠이 깔린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서 단풍이 절정을 넘겨버리기 전에 고향 영덕에 다녀오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자신이 어린아이같이 천진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무튼 즐거운 하루였다.